네코다 가쓰토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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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네코다 가쓰토시는 1964년 도쿄 올림픽부터 1976년 몬트리올 올림픽까지 4회 연속 올림픽에 출전하여 금, 은, 동메달을 각 1개씩 획득한 일본의 배구 선수이다. 그는 '세계 최고의 세터'로 칭송받았으며, '일본의 컴퓨터'라는 별명으로도 불렸다. 1980년 선수 은퇴 후 감독으로 활동하다 1983년 위암으로 사망했다. 그의 업적을 기려 네코다 기념 체육관이 건립되었고, 배구 명예의 전당에 헌액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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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코다 가쓰토시 - [인물]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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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본명 | 네코다 가쓰토시 |
원어명 | 猫田 勝敏 |
로마자 표기 | Nekoda Katsutoshi |
출생일 | 1944년 2월 1일 |
출생지 | 히로시마현 아사군 후루이치정 (현 히로시마시 아사미나미구) |
사망일 | 1983년 9월 4일 (39세) |
사망 장소 | 히로시마시 |
키 | 179cm |
포지션 | 세터 |
등번호 | 2 |
애칭 | 세계 최고의 세터 일본의 컴퓨터 |
선수 경력 | |
고등학교 | 슈토쿠 고등학교 |
소속팀 | 전매 히로시마 (1962-1980) |
코치 소속팀 | 전매 히로시마 (1975-1983) |
국가대표팀 | 일본 |
메달 기록 | |
올림픽 | 1972 뮌헨 남자 배구 - 금메달 1968 멕시코시티 남자 배구 - 은메달 1964 도쿄 남자 배구 - 동메달 |
세계 선수권 대회 | 1970 불가리아 동메달 1974 멕시코 동메달 |
월드컵 | 1969 동독 은메달 1977 일본 은메달 |
아시안 게임 | 1966 방콕 금메달 1970 방콕 금메달 1974 테헤란 금메달 1978 방콕 은메달 |
2. 생애
네코다 가쓰토시는 1964년 도쿄 올림픽부터 1976년 몬트리올 올림픽까지 4회 연속 올림픽에 출전하여(일본 남자 배구 선수 중 최다[5]) 금메달, 은메달, 동메달을 모두 획득한[6] "세계 최고의 세터"였다. 토스 정확성이 높아 "일본의 컴퓨터 네코다"라고도 불렸다.
『imidas 2001』(슈에이샤) "20세기를 만든 사람들 550"에서 배구 분야 3인 중 한 명으로 선정되었다. 일본 배구 협회 "배구 영예 선수상", 국제 배구 연맹 "세계 배구 20세기 최우수상 특별상"을 수상했다.[7]
노력가이자 인격자로 평생 배구에 헌신했으며, "천장 서브"를 개발했다.[8] 위암 투병 중 "어머니, 미안해"라는 말을 남겼고, 환각 속에서도 블록 사인을 내보냈다. 마지막 말은 "한 번 더... 한 번 더..."였다.[9]
1981년 위암 판명 후 절제 수술을 받았으나, 입원과 퇴원을 반복하다 1983년 9월 4일 사망했다.[17] 사촌의 아들은 프리미어 리그 파나소닉 팬서스 선수 출신 이마이 케이스케이다.[10]
2. 1. 유년 시절 및 선수 경력
네코다 가쓰토시는 히로시마현아사군고이치정(현 히로시마시아사미나미구)에서 태어나고 자랐다. 이 지역은 예로부터 배구가 성행했고, 부모님의 영향으로 히로시마 시립 고이치 초등학교에 입학하면서 자연스럽게 배구를 시작했다.[11] 히로시마 시립 아사 중학교 시절에는 9인제 배구에서 센터를 맡았다. 당시에는 9인제에서 6인제로 바뀌는 과도기였지만,[11] 소토쿠 고등학교에 진학한 후, 감독인 이나바 마사후미에게 세터로서의 자질을 인정받았다.[11] 1959년 1학년 때, 국체 고교 남자에서 우승을 차지했다.1962년 고등학교 졸업 후, 일본 전매 공사 히로시마 지방국 (현 일본 담배 산업 히로시마 지점)에 입사하여 전매 히로시마 남자 배구부 (현 히로시마 썬더즈)에 입단했다. 곧바로 당시 전일본 남자 감독 마쓰다이라 야스타카의 눈에 띄었다. 같은 해 12월, 18세에 처음으로 전일본에 선출되었다. 마쓰다이라 야스타카는 "네코다 군이 없었다면, 나는 세계 제일을 목표로 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라고 말했다.[12] 마쓰다이라는 뮌헨 올림픽에서 금메달을 딸 수 있는 팀을 만들겠다고 맹세하며, 1년 중 9개월을 전일본 합숙에 썼다.[11]
1964년, 20세에 도쿄 올림픽에 출전하여 동메달을 획득했다.[13] 일본이 선구적으로 시작한 다양한 퀵, 시간차 공격은 네코다를 빼고는 이야기할 수 없다.[12] 오픈 공격 한 우물만 파던 배구에 혁명을 일으킨 것이 네코다였다.[12] 이후 네코다는 전일본의 정세터로서 부동의 지위를 구축해 나갔다. 1968년, 마쓰다이라 감독 아래에서 멕시코 올림픽에 출전하여 은메달을 획득했다.
1971년 9월, 뮌헨 올림픽을 앞두고 경기 중 니시모토 테쓰오와 충돌하여 오른쪽 팔 복합 골절을 당했다. 네코다 없이 금메달 획득은 있을 수 없었고, 병원에 달려온 마쓰다이라는 네코다의 얼굴을 보자마자 "뭐하는 거야, 이 바보야!"라고 소리쳤다.[14]
1972년 6월, 올림픽 출전이 위태로웠지만, 약 8개월간의 재활 끝에 NHK컵에서 경기에 복귀했다. 올림픽 개막 2개월 전이었다. 도쿄 체육관에 모인 관객들은 큰 박수를 보냈다. 당시 전일본 남자를 모델로 한 『뮌헨으로 가는 길』 (TBS)이 큰 인기를 끌었고, 국민들의 배구에 대한 관심도 높았다.[14] 경기 후, 마쓰다이라는 "네코다가 돌아왔다"라고 흥분하며 말했다.[14] 같은 해 8월, 뮌헨 올림픽에서 염원하던 금메달을 획득, 일본 배구를 세계 정상으로 이끌었다.
1974년, 소속된 전매 히로시마에서 선수 겸 감독으로 취임했다.[15] 1976년, 몬트리올 올림픽에 출전, 4회 연속 일본 대표가 되었지만, 4위 입상에 머물러 4회 연속 메달 획득은 이루지 못했다. 개막식에서는 일본 선수단의 기수를 맡았다. 1980년, 불가리아에서 개최된 모스크바 올림픽 최종 예선에서 일본 대표는 올림픽 출전에 실패했다. 이 대회를 마지막으로 현역에서 은퇴하고 전매 히로시마의 감독에 전념했다.[16]
2. 2. 은퇴 이후

- 맹우였던 오코 세이지는 "전성기 때 전일본이 지면 '세터인 네코다의 책임이다'라고 언론에 두들겨 맞고, 대승하면 '공격진 대활약'이라는 활자가 신문에 실렸지만, 당시 멤버들만이 알고 있다. 진 것은 전부 공격수의 실수고, 이긴 경기는 전부 네코다의 토스 덕분이다"라고 말했다.
- 아테네 올림픽 전일본 남자 감독 다나카 미키오는 "네코다 씨가 살아있었다면 남자도 이렇게 약해지지 않았을 것"이라고 말했다.[18] 몬트리올 올림픽에서 세터 라이벌이 된 야나기모토 쇼이치는 "평생 이길 수 없다고 생각했다"고 말했다.[8][18] 2008년, 시모무라 히데시는 "지금의 전일본에 네코다 씨가 있다면 올림픽에서 금메달을 딸 수 있다"고 단언했다.[18]
- 소속팀 센바이 히로시마(현 JT 썬더스)에서는 1974년부터 선수 겸임 감독으로 활약, 1980년에 현역에서 은퇴하고 감독에 전념했다.[15] 사망한 1983년까지 약 8년 동안 감독을 맡았지만, 감독 재임 중, 일본 리그에서 2위 2회 (제7회, 제12회)를 기록했고, 제9회는 리그 최하위를 경험했다. 전일본의 세터로서 17년간 활약했지만 "나에게는 세계 제일보다 일본 제일이 더 어려울지도 모른다"는 것이 입버릇이었다고 한다.[15] 세터 후계자로 오사카 상업대고등학교의 세터 마나베 마사요시를 일찍부터 눈여겨보고, 마나베의 양친으로부터 대학 졸업 후 센바이 히로시마 입단을 약속받았지만, 마나베가 대학 2학년 때 네코다가 사망하여 마나베는 신일본제철에 입단했다.[15]
- 1989년(헤이세이 원년), 위업을 기념하여 네코다 기념 체육관이 히로시마시에 완성되었다. 관내에는 네코다의 활약을 소개하는 갤러리가 있다.
- 2003년(헤이세이 15년), 사후 20주년에 JT 썬더스는 공식전 회장에 "네코다 시트"를 설치하고, 부모와 자녀 페어를 초대하고 있다.[20]
- 2007년(헤이세이 19년), 사후 25주년에 히로시마현 스포츠 소년단 배구 교환 대회 초등학생부에 "네코다 메모리얼 베스트 세터상"이라는 기념상이 생겼다.[21]
- 2021년(레이와 3년), 아내가 성화 봉송 주자로 도쿄 올림픽(2020년 예정)이 1년 연기되어 5월 17일에 공도에서 개최될 예정이었지만 중단, 대신 히로시마 평화 공원에서 토치 키스에 참가했다.[22]
- 2023년, 배구 명예의 전당에 입성했다.[23]
3. 업적 및 평가
네코다 가쓰토시는 1964년 도쿄 올림픽부터 1976년 몬트리올 올림픽까지 4회 연속 올림픽에 출전(일본 남자 배구 선수 중 최다)하여,[5] 금메달, 은메달, 동메달을 모두 획득한[6] 뛰어난 선수였다. "'''세계 최고의 세터'''"라는 칭송을 받았으며, 토스의 정확성 때문에 "일본의 컴퓨터 네코다"라는 별명으로도 불렸다.
정보지 『imidas 2001』(슈에이샤)에서는 "20세기를 만든 사람들 550" 중 배구 분야에서 마에다 유타카, 오마츠 히로후미와 함께 3명 중 한 명으로 선정되었다. 일본 배구 협회의 "배구 영예 선수상"과 국제 배구 연맹의 "세계 배구 20세기 최우수상 특별상"을 수상했다.[7]
네코다는 노력가이자 인격자로 평생을 배구에 헌신했다. 기발한 기술인 "천장 서브"를 개발한 것으로도 유명하다.[8] 위암 투병 중에도 "어머니, 미안해"라는 말을 남길 정도로 가족을 생각했으며, 마지막 순간까지 블록 사인을 내보내는 등 배구에 대한 열정을 잃지 않았다.[9]
사후, 동료였던 오코 세이지는 전성기 시절 전일본 대표팀의 경기 결과에 대해 언론이 네코다에게 책임을 돌리는 경우가 많았지만, 실제로는 공격수의 실수로 진 경기도 네코다의 토스 덕분에 이긴 경기도 있었다고 회고했다. 아테네 올림픽 전일본 남자 감독 다나카 미키오는 "네코다 씨가 살아있었다면 남자도 이렇게 약해지지 않았을 것"이라고 말했다.[18] 몬트리올 올림픽에서 세터 라이벌이었던 야나기모토 쇼이치는 "평생 이길 수 없다고 생각했다"고 말했으며,[8][18] 시모무라 히데시는 "지금의 전일본에 네코다 씨가 있다면 올림픽에서 금메달을 딸 수 있다"고 단언했다.[18]
"천장 서브"는 뮌헨 올림픽 이후 새로운 무기가 필요하다고 생각해 고안한 것으로, 슈토쿠 고등학교 시절 9인제 옥외 연습장에서 하늘 높이 서브를 치던 경험에서 착안했다.[8]
소속팀 센바이 히로시마(현 JT 썬더스)에서는 1974년부터 선수 겸임 감독으로 활약, 1980년 은퇴 후 감독으로 전념했다.[15] 사망한 1983년까지 약 8년간 감독을 맡았지만, 일본 리그에서 2위 2회 (제7회, 제12회)와 최하위 (제9회)를 경험했다. 전일본 세터로 17년간 활약했지만 "나에게는 세계 제일보다 일본 제일이 더 어려울지도 모른다"는 말을 남겼다고 한다.[15] 마나베 마사요시를 후계자로 점찍었으나, 네코다의 사망으로 마나베는 신일본제철에 입단하게 되었다.[15]
네코다는 술을 매우 좋아했으며, 그 양이 엄청났다고 한다.[19]
1989년 그의 업적을 기리기 위해 네코다 기념 체육관이 히로시마시에 건립되었으며, 갤러리에는 그의 활약상이 전시되어 있다. 2003년 사후 20주년을 맞아 JT 썬더스는 공식전 회장에 "네코다 시트"를 설치하고 부모와 자녀 페어를 초대했다.[20] 2007년 사후 25주년에는 히로시마현 스포츠 소년단 배구 교환 대회 초등학생부에 "네코다 메모리얼 베스트 세터상"이 제정되었다.[21] 2021년에는 아내가 도쿄 올림픽 성화 봉송 주자로 참여했다.[22] 2023년 배구 명예의 전당에 헌액되었다.[23]
4. 플레이 스타일
네코다 가쓰토시는 1964년 도쿄 올림픽부터 1976년 몬트리올 올림픽까지 4회 연속 올림픽에 출전하여 금메달, 은메달, 동메달을 모두 획득한 일본 배구 선수이다.[5][6] "세계 최고의 세터"로 칭송받았으며, 정확한 토스 실력으로 "일본의 컴퓨터 네코다"라는 별명을 얻었다. 뮌헨 올림픽 금메달을 통해 일본 배구를 세계 정상으로 이끌었다.
4. 1. 천장 서브
네코다 가쓰토시는 평생 배구에 헌신한 노력가이자 인격자로, 기발한 기술인 "천장 서브"를 개발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8]5. 유산
- 맹우 오코 세이지는 "전성기 때 전일본이 지면 '세터인 네코다의 책임이다'라고 언론에 두들겨 맞고, 대승하면 '공격진 대활약'이라는 활자가 신문에 실렸지만, 당시 멤버들만이 알고 있다. 진 것은 전부 공격수의 실수고, 이긴 경기는 전부 네코다의 토스 덕분이다"라고 말했다.
- 아테네 올림픽 전일본 남자 감독 다나카 미키오는 "네코다 씨가 살아있었다면 남자도 이렇게 약해지지 않았을 것"이라고 말했다[18].몬트리올 올림픽에서 세터 라이벌이 된 야나기모토 쇼이치는 "평생 이길 수 없다고 생각했다"고 말했다[8][18] .2008년, 시모무라 히데시는 "지금의 전일본에 네코다 씨가 있다면 올림픽에서 금메달을 딸 수 있다"고 단언했다[18] .
- 기책 "천장 서브"는 뮌헨 올림픽 후 새로운 무기가 필요하다고 생각하여, 슈토쿠 고등학교 시절 9인제에서 옥외 운동장에서 연습할 때, 있는 힘껏 하늘을 향해 체공 시간이 긴 서브를 치던 것을 떠올려 도입한 것이다[8] .
- 소속된 센바이 히로시마(현 JT 썬더스)에서 1974년부터 선수 겸임 감독으로 활약, 1980년에 현역에서 은퇴하고 감독에 전념했다[15] . 1983년 사망할 때까지 약 8년 동안 감독을 맡았지만, 감독 재임 중 일본 리그에서 2위 2회 (제7회, 제12회)를 기록했고, 제9회는 리그 최하위를 경험했다. 전일본 세터로 17년간 활약했지만 "나에게는 세계 제일보다 일본 제일이 더 어려울지도 모른다"는 것이 입버릇이었다고 한다[15] . 세터 후계자로 오사카 상업대고등학교 세터 마나베 마사요시를 일찍부터 눈여겨보고, 마나베의 양친으로부터 대학 졸업 후 센바이 히로시마 입단을 약속받았지만, 마나베가 대학 2학년 때 네코다가 사망하여 마나베는 신일본제철에 입단했다[15] .
- 술고래였고, 게다가 끝이 없었다[19] .
- 2003년(헤이세이 15년), 사후 20주년에 JT 썬더스는 공식전 회장에 "네코다 시트"를 설치하고, 부모와 자녀 페어를 초대하고 있다[20] .
- 2021년(레이와 3년), 아내가 성화 봉송 주자로 2020년 예정이었던 도쿄 올림픽이 1년 연기, 5월 17일에 공도에서 개최될 예정이었지만 중단, 대신 히로시마 평화 공원에서 토치 키스에 참가했다[22] .
- 2023년, 배구 명예의 전당에 입성했다[23] .
5. 1. 네코다 기념 체육관
1989년(헤이세이 원년), 네코다 가쓰토시의 업적을 기리기 위해 히로시마시에 네코다 기념 체육관이 완공되었다. 체육관 안에는 네코다의 활약을 소개하는 갤러리가 있다.[19]
5. 2. 네코다 메모리얼 베스트 세터상
2007년(헤이세이 19년), 네코다 가쓰토시의 사후 25주년을 기념하여 히로시마현 스포츠 소년단 배구 교환 대회 초등학생부에 "네코다 메모리얼 베스트 세터상"이라는 기념상이 제정되었다.[21]5. 3. 배구 명예의 전당
1964년 도쿄 올림픽부터 1976년 몬트리올 올림픽까지 4회 연속 올림픽에 출전하여(일본 배구 남자 선수 중 최다[5]) 금메달, 은메달, 동메달을 획득했으며[6], "'''세계 최고의 세터'''"라고 칭송받았다. 토스의 정확성으로 인해 당시 세상에 알려지기 시작한 컴퓨터에서 이름을 따와 "일본의 컴퓨터 네코다"라고도 불렸다.일본 배구 협회의 "배구 영예 선수상"을 수상했고, 국제 배구 연맹의 "세계 배구 20세기 최우수상 특별상"을 수상했다.[7]
6. 소속팀
- 히로시마 시립 후루이치 초등학교
- 히로시마 시립 아사 중학교
- 소토쿠 고등학교
- 전매 히로시마 (현 히로시마 썬더즈)
7. 수상 경력
네코다 가쓰토시는 현역 시절 포지션은 세터였으며, 제1회 일본 리그 베스트 6(1967년), 제2회 일본 리그 베스트 6, 리시브상(1969년), 1969년 월드컵 배구 베스트 세터상, 제3회 일본 리그 베스트 6(1970년), 1970년 세계 배구 선수권 대회 베스트 6, 제4회 일본 리그 베스트 6(1971년), 제6회 일본 리그 리시브상(1973년), 제7회 일본 리그 베스트 6, 리시브상(1974년), 제8회 일본 리그 베스트 6(1975년), 1977년 월드컵 배구 토스상(1977년)을 수상했다. 은퇴 후에는 일본 배구 협회 배구 영예 선수상(1980년), 은배 1조 (유족 추증)(1983년), 중화인민공화국 올림픽 백년 백걸(1993년), 국제 배구 연맹 세계 배구 20세기 최우수상 특별상(2001년)을 받았고, 2023년 배구 명예의 전당에 헌액되었다.
7. 1. 국가대표팀
7. 2. 개인
연도 | 수상 |
---|---|
1967년 | 제1회 일본 리그 베스트 6 |
1969년 | 제2회 일본 리그 베스트 6, 리시브상 |
1969년 | 1969년 월드컵 배구 베스트 세터상 |
1970년 | 제3회 일본 리그 베스트 6 |
1970년 | 1970년 세계 배구 선수권 대회 베스트 6 |
1971년 | 제4회 일본 리그 베스트 6 |
1973년 | 제6회 일본 리그 리시브상 |
1974년 | 제7회 일본 리그 베스트 6, 리시브상 |
1975년 | 제8회 일본 리그 베스트 6 |
1977년 | 1977년 월드컵 배구 토스상 |
1980년 | 일본 배구 협회 배구 영예 선수상 |
1983년 | 은배 1조 (유족 추증) |
1993년 | 중화인민공화국 올림픽 백년 백걸 |
2001년 | 국제 배구 연맹 세계 배구 20세기 최우수상 특별상 |
2023년 | 배구 명예의 전당 |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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웹사이트
Katsutoshi Nekoda
https://www.olympedi[...]
2023-09-19
[2]
웹사이트
Induction Class of 2023 and Award Winners Announced
https://www.volleyha[...]
2023-05-22
[3]
간행물
2023 Volleyball Hall class includes Phil Dalhausser, Larissa, Katsutoshi Nekoda, Yumilka Ruiz
https://volleyballma[...]
2023-05-22
[4]
웹사이트
猫田勝敏
https://kotobank.jp/[...]
日外アソシエーツ「20世紀日本人名事典」コトバンク
2018-07-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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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
サオリン、リオ切符!伊に敗戦も2セット奪取で4大会連続五輪
https://www.sponichi[...]
スポニチ
2016-05-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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今井啓介オフィシャルブロ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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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COOP'83 バレーボールを100倍面白くした名セッター猫田逝く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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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世界一のセッター(1)「スパイクミスは俺のせい」"
2008-05-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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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世界一のセッター(4)「仲間うなった酒席での持論」"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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没後20年を記念し「猫田シート」設定 JT
https://web.archive.[...]
中国新聞(Internet Archive)
2003-12-03
[21]
웹사이트
"「名セッター猫田」次代にトス 広島県スポ少バレーに記念賞"
https://web.archive.[...]
중국신문(Internet Archive)
2007-12-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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웹사이트
NHK「東京2020オリンピック」
https://sports.nhk.o[...]
[23]
웹사이트
Katsutoshi Nekoda - Class of 2023
https://www.volleyha[...]
2024-03-24
[24]
서적
『叙勲・褒章の手引 映えある栄典の日のために』
千秋社
1985-01-01
[25]
뉴스
『毎日放送』
1984-07-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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